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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대선특집 - 대통령의 애창곡① (이승만~최규하)

대한민국 18대 대통령이 뽑혔다. 인물로는 열한 명째다. M에서는 대선 특집으로 역대 대통령들의 음악 관련 정책 분석!!!...을 하려고 했으나 능력이 부족해서 뒤로 미루도록 하고, 우선 가볍게 시작하려고 한다. 대통령 당선자를 포함해 역대 대통령 열한 명은 어떤 노래를 즐겨 불렀을까? 그들의 애창곡을 정리해봤다. 첫 회에서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부터 최규하 10대 대통령까지 전 대통령 4명의 애창곡을 모았다.





이승만(1~3대)


이승만 전 대통령은 노래를 즐겨 부르는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가 좋아한 노래는 <희망가><타향살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던 그는 찬송가 <멀리 멀리 갔더니>도 좋아했다고.

미국 찬송가 <When we arrive at home>에 우리말 가사를 붙인 <희망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이자 현존하는 상업 음반에 수록된 최초의 유행가이다. 1921년 박채선과 이류선이 무반주 이중창으로 노래를 녹음했다(당시 제목은 <이 풍진 세월>).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930년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수 채규엽 선생이 부를 때부터였으며, 이후 많은 가수들이 각기 다른 버전으로 노래를 불렀다. 일제 강점이라는 '풍진(風塵)세상'을 만난 사람들의 실의를 달래주고, 현실을 피하는 청년들에게는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가사가 설교조라서 일부 서민들은 '절망가' '실망가'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윤형주, 김세환이 부른 버전이다.



<희망가>를 부른 원로가수 중에 고복수 선생이 있다. 고 선생이 1934년 부른 처녀작 <타향살이>는 손목인 선생의 구슬픈 가락에 김능인 선생이 붙인 쓸쓸한 가사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픔이 워낙 절절히 담겨 있어서, 노래를 듣고 자살하는 사람이 생기는 바람에 '자살을 부르는 노래'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고복수 선생의 <타향살이>


이 전 대통령은 미국 망명 시절 찬송가 <멀리 멀리 갔더니>를 매일 부르며 조국을 생각했다고 한다. 하와이에서 사망한 그의 유해가 우리나라로 돌아와 장례식을 치룰 때, 성악가 김천애·이인숙 여사 등이 이 노래를 불렀다. 원곡은 <I am coming to the cross>로 미국에서 19세기 중반 활동했던 윌리엄 맥도날드 목사가 만들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즐겨 부르던 <멀리 멀리 갔더니>



윤보선(4대)


윤보선 전 대통령도 노래를 즐겨 부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가 가끔 불렀던 노래는 김부해 선생의 곡에 반야월 선생이 노랫말을 붙이고 박재홍 선생이 부른 <유정천리>다.


영화 제작자 이태원이 1959년 처음 만든 영화 <유정천리>의 주제가인 이 노래는 전쟁에 이은 혼란에 지치고 상처 받은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안 그래도 추잡한 정치권을 비꼬는 노래 <물레방아 도는 내력>으로 찍혔던 박재홍은 이 노래로 경찰에 불려가는 등 수난을 당했다. 이 노래는 1960년 대선을 앞두고 조병옥 박사가 급사하자 추모곡으로 불리며 재탄생했다.


박재홍 선생의 <유정천리>


박정희(5~9대)


박정희 전 대통령은 노래를 즐겨 부르는 편이었다. <새마을 노래>는 자신이 직접 가사를 지어 불렀다. <잘 살아보세>, <전우야 잘자라>, <짝사랑> 등이 그의 애창곡이었다. <동백 아가씨>도 즐겨 불렀는데, 정작 이 노래는 당시 왜색가요 판정을 받아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다. 그밖에 명국환, 김세레나, 하춘화, 심수봉의 노래를 좋아했다. 일본 대중음악 '엔카'에 심취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증언도 있어서 확언하긴 어렵다.


<새마을 노래>는 박 전 대통령이 작사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 작곡은 서울대 음대를 나온 둘째딸 박근영 전 육영재단 이사장이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콩나물 좀 붙여봐라"고 했다고 한다. 새마을운동과 맞물려 전국 방방곡곡에서 매일 들려왔던 노래다. 


<잘 살아보세>도 <새마을 노래>와 함께 늘 나왔던 소위 '건전가요' 중 하나다. 1962년 정부 요청으로 김희조 선생이 작곡하고 한운사 선생이 작사한 노래는 방송을 통해 보급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작사한 <새마을 노래>


 


<전우야 잘 자라>라는 제목은 잘 몰라도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라는 가사는 많은 사람이 기억할 것이다. 1950년 9.28 서울수복과 함께 창설된 국방부 정훈국 소속 문예중대에 입대한 유호 선생과 박시춘 선생이 북진하는 국군 사기를 북돋는 노랫말과 곡을 만들고, 현인 선생이 불렀다. '감상주의적인 노래'라는 이유로 정식 군가가 되지 못하고 '진중가요'에 머물렀지만, 딱딱한 군가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은 노래다.


<전우야 잘 자라>


당대 명가수인 고복수 선생은 박 전 대통령에게도 사랑받았다. 손목인 선생이 작곡하고 박영호가 노랫말을 붙인 <짝사랑>을 좋아했다. 꽤 오랫동안 이 노래의 작사가는 김능인 선생으로 알려졌으나, 김 선생은 노래가 나온 1937년 이전에 타계했다. 2004년, 박 전 대통령이 장모 팔순잔칫날(1975년) 이 노래를 무반주로 부르는 모습이 공개된 바 있다. 참고로 이젠 많이들 아시겠지만, 첫 소절에 나오는 '으악새'는 억새다.


 


 

의외로 박 전 대통령이 즐겨부른 노래가 <동백아가씨>다. 엄앵란-신성일 주연의 동명 영화 주제곡으로 1964년 이미자가 불러 100만장 이상을 팔아 치우고 레코드사를 먹여 살린 이 노래는 1년 뒤 금지곡으로 지정됐고 68년에는 음반 발매 자체가 중단되었다. 사유는 '왜색풍' 즉 일본 분위기가 짙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65년 일본과 수교를 맺은 뒤 국민들의 반발이 예상 외로 거세자, 자신의 민족의식을 과시할 요량으로 <동백아가씨>를 금지시켰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 이미자 본인은 "경쟁사였던 오아시스 레코드도 입김을 불어넣었다"고 증언했다. 1972년 후쿠다 일본 외상이 방한했을 때, 박 전 대통령은 그녀에게 <동백아가씨>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본인은 노래가 금지곡으로 묶인 줄 몰랐다는 말이 있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최규하(10대)


말수부터가 적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이 노래를 즐겨 불렀을 리 만무하다. 그가 가끔 불렀던 노래는 <비 내리는 고모령><울고 넘는 박달재> 정도다.


<비 내리는 고모령>은 유호 선생이 '호동아'라는 필명으로 작사했고 박시춘 선생이 작곡했으며 현인 선생이 노래를 불렀다. 1948년에 발표했다. 노래의 배경인 고모령은 대구에 있는 고갯길이다.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사연을 담아 오랫동안 애창되었고, 1969년에는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현인 선생이 부르는 <비 내리는 고모령>

 

 

<울고넘는 박달재>는 <유정천리>의 주인공 박재홍 선생이 광복 직후 불러 히트친 노래다. 반야월 선생이 작사하고 김교성 선생이 작곡한 이 노래에 등장하는 박달재는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 사이에 있는 고개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로 시작하는 가사 때문에 박달재가 천등산에 있는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천등산은 제천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고, 고개 이름은 다릿재다. 반야월 선생이 고개에서 이별하는 부부를 목격하고 노랫말을 만들었다고 한다.

 


박재홍 선생의 <울고 넘는 박달재>

 

 

대통령의 애창곡은 2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