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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s

[밴드 루나와 시간여행자들] 경계를 허물다 "음악은 차이를 통해 진화하죠"

 

 

지난해 3월 한 유투브 영상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세계적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부두차일(Voodoo Chile)>을 연주하는 한국인 여성. 그녀와 한몸이 되어 세계를 열광시킨 악기는 다름 아닌 우리 전통악기 가야금이었다. 

 

누적 조회수 290만 건을 넘어선 이 영상에서 농현(줄을 흔들어서 떠는 소리를 내는 것)의 진수를 보여준 이루나(Luna,예명)씨는 ‘블루스’라는 전혀 다른 장르를 통해 국내외 음악팬들에게 가야금의 매력을 각인시켰다.

 

▲  루나가 연주하는 지미 헨드릭스의 부두차일 가야금 버전

 

 

일약 유투브 스타로 떠오른 그녀는 올해 초 미국 투어에 나섰다.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단 세 번의 공연을 열었지만 한인사회를 비롯해 현지의 반응은 뜨거웠다. 미 음악방송 채널 에코스(Echoes)의 프로그램에 출연해 라이브 연주를 펼쳤고 스포츠 채널인 ESPN의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ESPN Fan Jam'이라는 로고송 콘테스트에 참가해 유수한 미국인 연주자들을 제치고 최종 라운드에 올라 화제가 됐다. ESPN Fan Jam은 8명의 뮤지션이 ESPN 스포츠센터의 주제가인 '다다다다다다(Da da da da da da)'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연주해 우승자를 가리는 경연 프로그램이다.

 

 

▲ 미 스포츠채널 ESPN이 주최하는 로고송 콘테스트에서 2위를 차지한 루나의 가야금 버전

 

 

한국에 돌아온 그녀가 이번에는 밴드 ‘루나와 시간여행자들(Luna And The Time Travelers)'을 결성해 새로운 음악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녀는 자신의 밴드를 “한국의 대표 전통악기인 가야금 연주자 루나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여행자들을 만나 가장 한국적인 블루스 록을 연주하는 밴드”라고 소개했다.

 

실제로 밴드를 구성하는 세 멤버들은 지향하는 음악세계가 저마다 다르다. 키보드 기타를 담당하는 안재홍(26)씨는 1960년대 과거를 풍미한 싸이키델릭-블루스 록을, 베이시스트 겸 프로듀서인 김강열(27)씨는 현재 유행중인 대중음악을, 미국 출신의 드러머 디앤쏘니 넬슨 주니어(DeAnthony Nelson Jr.)(29)씨는 미래적 사운드인 일렉트로니카를 추구한다.

 

‘음악’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서로 다른 시대에서 건너온 루나와 시간여행자들이 지난 9일 저녁 9시, 서울 홍대에 위치한 라이브홀 잭비님블에서 두 번째 시간여행을 떠났다. 이날 공연에서는 지미 헨드릭스의 <부두차일>을 비롯해 빌 위더스(Bill Withers)의 <저스트 투 오브 어스(Just The Two Of Us)>, 레이 찰스(Ray Charles) 원곡의 <힛 더 로드 잭(Hit The Road Jack)> 등 블루스 명곡이 가야금 선율과 함께 새롭게 편곡됐다. 세 자작곡도 연주됐다. 앵콜곡으로 연주한 <아리랑>을 끝으로 60분간의 여행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온 루나와 시간여행자들을 공연장 한 켠에서 만났다.

 

 

▲ 밴드 루나와 시간여행자들이 9일 홍대 라이브클럽에서 두 번째 공연을 가졌다. ⓒ 임종헌

 

 

“서로가 음악적 영감이 되죠”

 

밴드는 저마다의 색깔을 지니기 마련이다. 처음 마주한 루나와 시간여행자들에게서는 ‘순수한 즐거움'이 느껴졌다. 무대 위에서 보여준 이색적인 화합만큼이나 개인으로서 밴드 멤버들도 무척 가까워 보였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피아노를 함께 치며 농담을 건네는 등 웃음이 떠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루나와 멤버들은 밴드활동에 대해 하나같이 “재미있다”고 입을 모았다. 추구하는 장르는 다르지만 그 ‘다름’이 새로움과 놀라움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루나씨는 “본래 서로 다른 음악을 하지만 정말 화합이 잘 되는 편”이라며 “시너지 효과도 많이 나고 합주를 하면서 음악적으로 많이 발전하는 걸 스스로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뉴질랜드에서 재즈 피아노를 전공한 뒤 밴드에서 키보드 기타를 연주하는 안재홍씨 역시 “밴드를 하면서 배우는 점이 많다”고 말했다.

 

“가야금만 할 수 있는 프레이징(phrasing, 분절법)이 굉장히 많아요. 신기해서 제 악기에 똑같이 따라하기도 하는데, 물론 똑같이 되진 않지만(웃음) 따라하면서 저만의 새로운 것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사람도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나면서 서로 배우듯, 음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꼭 가야금이 아니더라도 다른 뮤지션들과 음악을 하는 게 도움이 되죠.”

 

밴드의 베이시스트이자 가수 아이유에게 곡을 주기 위해 음악 프로듀싱을 시작했다는 김강열씨는 “대중가요 위주로 곡을 만들기 때문에 전형적인 음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밴드를 하면서 즉흥적인 요소를 많이 배운다”면서 “각자 다른 배경 아래서 음악을 했던 사람들이 만나다 보니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는 즐거움이 크다”고 덧붙였다.

 

한편 밴드는 ‘기술적 어려움’을 과제로 꼽았다. 가야금이라는 어쿠스틱 악기와 전자 악기가 만나 하나의 소리를 내다 보니 가야금의 볼륨 조절이 어렵다는 것. 공연장의 규모나 상황에 따라 가야금 소리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들은 "가야금의 소리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픽업(음향 증폭장치)과 이펙터(전기 신호화한 음을 가공해 원음과는 다른 음으로 변화시키는 장치)를 활용하고 연구하면서 기술적 문제를 해결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가야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르는 ‘블루스’

 

음악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이들의 첫 번째 도착지는 블루스가 흐르는 1960년대다. 밴드의 키보드 기타가 단연 돋보일 것 같지만 놀랍게도 이 여행의 주인공은 가야금을 연주하는 루나씨다. 그녀는 “전통 악기인 가야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르야말로 블루스”라고 말했다.

 

▲ 가야금 연주자 루나가 블루스 리듬에 맞춰 가야금을 뜯고 있다 ⓒ김태경

 

 

“가야금은 본래 우리 전통음계인 5음계를 사용해요. 거기에 한 음만 더하면 블루스 음계와 같은 음계가 되죠. 또 가야금의 다양한 왼손 연주법은 음을 꾸미는 역할을 하는데 왼손의 다이나믹(Dynamic, 강약법)이 블루스 느낌을 표현하는 데 탁월하죠. 블루스 기타 연주자들이 제 연주를 보면서 가끔 부러워해요. 악기적인 특성상 가야금이 기타보다 벤딩(bending, 기타 줄을 당기는 기술)이 깊게 되거든요.

 

가야금과 비슷한 악기로 분류되는 고토(일본의 전통 현악기)나 쟁(중국의 현악기)도 가야금만큼 깊은 벤딩은 불가능해요. 실제로 제 유투브 영상 중 블루스 록 장르의 조회수가 현저하게 높은데 대중들의 반응이 제 의견을 뒷받침해주는 셈이죠.”

 

그녀는 또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듣지만 연주는 가야금에 어울리는 곡을 위주로 한다”며 “앞으로 밴드와 함께 팝, 알앤비,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사운드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국악으로 세계적 음악 만들 것"

 

지금까지 루나가 블루스를 비롯해 해외 명곡들을 가야금으로 재해석해 한국 전통악기의 매력을 알렸다면, 밴드 루나와 시간여행자들은 국악을 모티브로 한 자작곡들을 통해 새로운 퓨전음악을 선보일 예정이다. 기본적으로는 ‘월드뮤직’을 지향하지만 전통 장단이나 민요 등 국악적 요소를 참고해 한국의 음악을 알리겠다는 것.

 

이날 공연에서는 지금까지 완성된 세 곡의 자작곡을 발표했다. 블루스 록으로 편곡해 원곡의 애절함을 극대화시킨 남도민요 <새타령>, 사물장단에 주로 사용되는 3박과 2박을 활용해 흥겨움을 강조한 <하늘의 궁전>, 경쾌한 동살푸리 장단을 살린 <호박마차>, 모두 루나씨가 국악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곡들이다.

 

 

▲ 루나와 시간여행자들의 자작곡 중 하나인 '호박마차'

 

 

국악을 차용한 자작곡에서 가야금 연주가 돋보일 것이라 기대했으나 오히려 밴드 멤버들이 지닌 색깔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특히 <새타령>에서는 키보드 기타의 록적인 요소와 민요의 조화로움이, <호박마차>에서는 전통 장단에 맞춘 드럼비트와 가야금 솔로의 ‘유쾌한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밴드는 “평화와 화합의 느낌으로 장르간 경계가 없는 음악을 연주하고 싶다”며 “진심을 담은 솔직함으로 음악팬들에게 다가갈 것”이라고 말했다.

 

 

▲ 공연을 마친 루나와 시간여행자들이 인터뷰 질문에 답하고 있다 ⓒ임종헌

 

이제 막 국내에서의 두 번째 공연을 마친 루나와 시간여행자들의 앨범은 오는 가을쯤 만나볼 수 있을 예정이다. 안타깝게도 키보드 기타리스트 안재홍씨가 개인적 사정으로 밴드에 참여할 수 없게 되면서 앞으로의 활동에는 ‘새로운 시간여행자’가 합류할 계획이다. “각 멤버들의 특기를 살려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관객들과 함께 시간 여행을 하고 싶다”는 밴드는 국내 공연 이외에도 음악 페스티벌 등 다양한 해외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다.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는 말이 있다. 혁신과 창조가 중시되는 시대, 우리에게 과거란 ‘현재와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았던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처럼 기존의 것들을 끊임없이 바꾸는 것만이 오늘날 최고의 덕목처럼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혁신이란 때로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혹은 잊고 있었던 과거와의 '조우' 속에서 발견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루나와 시간여행자들과 함께 떠날 시간여행 속에서 지나간 것들의 미래적 가치를 찾을 수 있길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