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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s

[Fake Virgin 허바이올렛 대표] 지속가능한 인디 씬의 성장을 꿈꾸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은 내한공연의 불모지와 같았다. 글라스톤베리와 같은 대규모 음악 페스티벌은 꿈같은 일이요, 유명 가수의 내한공연은 떠들썩한 이슈가 되곤 했다.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꼭 한번 ‘찍고’ 가는 이웃나라 일본을 부러워하는 이들도 꽤 있었으리라. 게다가 전성기가 한참 지나 한국을 찾은 일부 뮤지션들은 립싱크나 지각 등의 ‘무성의한 태도’로 음악팬들을 실망시켰다. 공연시장의 아시아 프로모션에 있어 한국이 주요국가가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음악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내한 불모지’는 이제 옛말이 됐다. 몇년 새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하는 각종 록 페스티벌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소위 잘나가는 해외 뮤지션들의 방한은 더 이상 큰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지난해 메탈리카, 레이디가가, 제이슨 므라즈, 시규어 로스를 비롯해 올해 상반기만 해도 브루노 마스, 제프 백, 존 메이어 등 다양한 장르의 유명 뮤지션들이 국내 팬들을 만났다.

 

▲ 2012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현장 (사진출처 연합뉴스)

 

그러나 세월호 참사의 여파로 문화예술계 역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 이후 개최 예정이었던 전국적인 규모의 공연 및 축제 26건 중 16건이 취소되거나 연기됐다. 대표적 여름 락페 중 하나인 ‘안산 밸리 록 페스티벌’의 공연 취소가 대표적이다.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는 공연의 경우에도 120여 건이 취소된 바 있다. 예컨대, 봄 음악 페스티벌 ‘뷰티풀 민트 라이프’는 공연 하루 전 고양시의 일방적인 취소 통보로 무산됐다.

 

물론 국가적 재난에 대해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한다는 취지지만 이 같은 일방적 공연 취소는 동시에 국내 공연예술의 위상과 한계를 보여준다. 문화예술계의 장기 침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공연기획자 허바이올렛(본명 허지영) Fake Virgin 대표는 "지속가능성이야말로 전체적인 음악씬 성장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연기획 전문업체 수퍼컬러수퍼(SuperColorSuper,이하 SCS)의 공동대표로 지난 4년간 다양한 해외 인디뮤지션들의 공연을 이끌어온 그녀는 이달 초 SCS 운영 중단을 선언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브랜드 Fake Virgin(http://www.fakevirgin.com)을 만들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20일 저녁, 서울 홍대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더 좋은 공연을 만들기 위한 불가피한 변화였죠”

 

해외음악 특히 해외인디음악을 좋아한다면 SCS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2009년 미국인 션 마일런을 중심으로 설립된 SCS는 해외 아티스트들의 내한 공연을 주관해왔다. ‘두 잇 유어셀프’(Do It Yourself)', 즉 주최자가 스스로 준비하고 진행하는 'DIY 투어'를 표방해 파격적으로 공연 가격을 낮추며  주목을 받았다. 모과이(Mogwai), 블론드 레드헤드(Blonde Redhead), 포텟(Four Tet) 등 국내외에서 주목 받는 200여 팀의 인디 뮤지션들이 SCS를 통해 국내 팬들과 함께 했다.

 

2010년 10월 SCS에 합류한 허바이올렛 대표는 지난 4년간 프로모터이자 공동대표로서 SCS를 꾸려왔다. 그녀는 “SCS에서 활동하며 공연기획자로서 배운 점도 많았지만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했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 금전적인 문제가 가장 컸기 때문에 전체적인 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공연 후 수익이 나면 그 자금으로 다음 공연을 개최합니다. 하지만 수익이 항상 나는 건 아니고 우리가 스폰서가 있거나 자본력이 있는 게 아니어서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사실 질적으로 조금 떨어지는 공연을 할 때도 있었어요.”

 

SCS는 다른 공연기획 업체에 비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공연을 제공해왔다. 공연의 규모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다수의 공연이 5만원 안팎의 수준이다. 애초에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공연 문화의 활성화를 목표로 한 단체의 특성상 금전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도 무리하게 공연을 추진해왔다는 것. 무급 인턴십 제도 역시 주변으로부터 적지 않은 불만과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동업자인 션 마일런 대표와의 갈등도 그녀가 자립을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서로 다른 업무 처리 방식이나 사생활 문제 등으로 인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아 왔다는 것이다. 허 대표는 “특히 질보다 양을 추구하는 면이 맞지 않았다”면서 “끊임없이 많은 공연을 하는 것이 씬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믿는 친구였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나와 완전히 다른 탓에 충돌이 잦았다”고 솔직한 심경을 표했다.

 

 

소소한 즐거움이 함께 하는 양질의 공연 선사할 것

 

시스템 개선과 더불어 궁극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허 대표는 SCS에서 함께 일하던 4명의 스텝들과 새로운 회사 'Fake Virgin'을 설립했다. 적정 수준의 가격으로 흥행성은 물론 실력을 갖춘 뮤지션들을 섭외해 국내 팬들에게 '등골 서늘해지는 라이브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서다. 오는 7월에는 국내에 두터운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미국 출신의 일렉트로닉 밴드 '다크사이드(Darkside)'가, 9월에는 영국 출신의 일렉트로닉 뮤직 듀오 '본닥스(Bondax)'가 방한할 예정이다. 'Fake Virgin'은 해당 머천다이즈를 직접 제작해 판매하는 등 보다 완성도 높은 공연과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 Fake Virgin 허바이올렛 대표 ⓒ허지영

 

프로모션 역시 기존의 형식을 탈피해 관객들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다크사이드' 공연의 조기 예매자에 한해 ’다크사이드 다크 초콜릿‘이 특별선물로 제공된다. 허 대표는 “디테일한 것들에 좀 더 신경 쓰는 공연을 만들어 갈 것”이라며 “공연 이외에도 다양한 재미를 경험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Fake Virgin은 해외뮤지션들의 내한공연은 물론 국내 뮤지션들의 해외 투어도 함께 추진할 계획이다.

 

“SCS를 하면서 주변에서 추천을 많이 받은 부분이기도 해요. 해외에서 뮤지션을 데려오는 만큼 반대로 내보내는 것은 어떠냐고요. 그래서 국내 밴드들도 가까운 이웃나라부터 시작해서 투어를 만들어보려고 해요. 꾸준하고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요. 국내 밴드가 해외로 투어를 나가는 일이 대서특필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 되는 게 사업의 목표에요.”


 

리버풀의 열정을 홍대로  … 현실이 된 6년 전 약속

 

허 대표를 만난 20일 오후 9시, 서울 홍대 근방에 위치한 라이브클럽 ‘스트레인지 프룻(Strange Fruit)'에서 Fake Virgin의 대표로서 그녀의 첫 공연이 열렸다. 공연의 주인공은 영국 리버풀 출신 밴드 샤이 네이처(Shy Nature). 사실 그들은 허 대표의 오랜 친구들이다. 6년 전 런던 유학 당시 우연한 기회로 그들의 공연을 보게 됐고 그 만남이 인연이 되어 뮤지션과 공연기획자로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것.

 

▲ 20일 홍대 클럽에서 영국 밴드 Shy Nature가 첫 공연을 가졌다. ⓒ허지영

 

 

“런던 엔젤역 근처에 있는 작은 펍이었을 거예요. 정말 우연히 보게 됐는데 그들의 꾸밈없고 열정적인 공연이 당시 그곳 생활에 적응하고 있던 제게 커다란 위로가 됐죠. 마이스페이스 주소를 교환하면서 친구가 됐고 리버풀에 있는 그 친구들의 스튜디오에 초대를 받기도 했어요 (웃음)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나중에 꼭 공연기획자가 되어서 너희를 부를거야’ 하고 약속했는데 6년 전 그 약속을 드디어 지키게 됐네요.”

 

허 대표는 “자신만의 이름을 걸고 진행하는 첫 번째 공연이기도 하지만 아련한 추억 속에 담아 두었던 약속을 지키게 되어 어느 때보다도 뜻 깊다”고 소감을 전했다. 샤이 네이처 역시 “바이올렛의 연락을 받고 정말 믿을 수 없었다”며 “의미 있는 자리에서 오랜 친구와 함께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화답했다.

 

 

행복을 나누기 위해 선택한 길

 

우연히 시작된 샤이 네이처와의 인연은 그녀를 공연기획자의 길로 이끌었다. 대학에서 텍스타일 디자인을 공부한 허대표는 국제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1년간 영국에서 지내며 패션 사업에 몰두하기도 했다. 하지만 순수한 열정으로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과 소통하고 영국의 자유로운 공연 문화를 경험하면서 공연기획이라는 새로운 꿈을 찾게 됐다.

 

“런던에 있을 때 브릭레인쪽에 살았는데 그 주변에 공연이나 파티가 많이 열렸어요. 한국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거나 생각하지 못한 것들도 많았어요. 거기서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한국에 돌아오면 기획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구요. 제가 느낀 것들을 보여주고 싶고 함께 경험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당시 저렴한 가격으로 다채로운 해외 뮤지션들을 초청하는 SCS가 눈에 들어왔었죠.”

 

 

ⓒ허지영

 

허 대표는 국내 공연사업의 과제로 ‘가격의 안정성’을 지적했다. 모든 공연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중 대다수가 “굳이 그 가격이어야 할까?”하는 의문을 들게 한다는 것.

 

“우리나라는 씬 자체가 일본에 비해서도 작고 이런 공연 문화가 커지기 시작한 것도 몇 년이 채 안 돼요. 작년에는 페스티벌이 많았는데 올해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고 저는 그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은 페스티벌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페스티벌의 성격도 크게 분명한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겠어요. 일시적이고 상업적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 동안 공연사업을 해오면서 내가 라디오헤드 같은 대스타를 부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를 부르더라도 지속적으로 올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녀는 “단기간에 공연사업이 성장하면서 경쟁자가 많아지고 아티스트의 개런티가 높아짐에 따라 공연 가격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또 “지속가능성이야말로 전체적인 씬 성장을 위해 필요하다"면서 "상업이 개입된 보여주기식 페스티벌은 오래 가지 못할뿐더러 문화적으로도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고 당부했다.

 

 

“가치를 나누는 소비가 더 좋은 공연 창조” … 사회적 기업으로의 도약

 

허 대표는 올해 봄부터 미혼모들의 아기를 돌보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작은 보탬이나마 사회에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공연 역시 "단지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소비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공연을 보는 사람들은 어쨌든 소비를 하는데 그 소비가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기여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해왔어요. 예를 들어 티켓 가격의 일부가 기부에 사용되는 시스템을 도입할 수도 있겠죠. 자신의 소비가 가치 있게 느껴질 수 있도록 언젠가 회사를 사회적 기업으로 키워보고 싶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거예요.”

 

허 대표는 또 자신의 사업이 음악씬 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기를 기대했다. 가까운 미래에는 공연 기획 에이전트나 투어 매니저를 교육하고 양성해보고 싶다는 것. 그녀는 “음악과 관련된 직업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음악씬이 커진다는 것”이라며 “그로 인해 뮤지션들의 먹고 사는 문제도 좀 더 수월해질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시절 다른 어떤 채널보다 MTV를 좋아했다는 그녀. 장기자랑을 위해 다른 친구들이 H.O.T나 핑클의 안무를 따라할 때 TLC의 노래 'Waterfall'에 맞춰 춤을 준비했다는 바이올렛 그녀가 보여줄 다음 무대는 어떤 색으로 채워지게 될까? 빨주노초파남보, 우리가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보통의 무지개 색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때로는 낯설고 때로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실제 무지개 색에 가까우리라. 그녀가 차곡차곡 쌓아 나갈 색의 향연이 국내 인디 씬을 더욱 다채롭고 풍성하게 만들 수 있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