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port

[책과 음악] 모멸사회와 우리 안의 조현아

 

 

인간의 행동을 이끄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말처럼 객관적 이성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좌우하는 걸까? 김찬호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는 저서 <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이하 모멸감)>에서 “감정은 이성보다 더욱 근본적이고 강력하다”고 말한다. 감정이란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잉여가 아니라, 중대한 인간사를 좌우하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에 의식하지 못한 ‘감정’에 의해 흔들리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적 행동을 이끄는 감정의 세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감정은 의식의 수면 아래서 나를 계속 움직이지만 우리는 정작 그 실체, ‘또 다른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버드 대학  경영연구소의 임상 사례 결과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감정에 무지하며 학식이 높은 사람도 자기 감정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우리가 처음 가본 도시에 대해 아는 정도밖에 알지 못한다. 몇 가지 특징적인 구조물 정도는 인식하지만 일상생활의 미묘한 리듬 같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 … … 그것은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을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미묘하고, 스스로 위장을 잘한다. (p.27)

 

 

 

 

 

모멸감 …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마음 풍경

 

저자는 한국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감정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며 오늘날 한국인들의 마음 풍경을 ‘모멸감’이라는 감정으로 틀짓기한다. 생소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이 낯선 감정의 응어리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며 불행의 씨앗으로 작동한다.

 

지금 우리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몇 가지 현상을 제시한다면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 극심한 입시 경쟁, 과도한 성형 수술, 인터넷에 범람하는 악플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정황 이면에는 낮은 자존감이 깔려 있으며 이는 곧 자기에 대한 사랑의 부족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타인을 통해 확인받고 싶은 욕구는 엄청난데 서로를 인정해주는 너그러움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범람하는 경쟁사회에서 웬만큼 잘나지 않으면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결국 여기서 비롯되는 결핍과 공허를 채우려 애를 쓰게 되는데,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취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타인에 대한 모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누군가를 모욕하고 경멸하면서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셈이다.

 

 

 

 

 

모욕과 멸시가 우리를 지배하는 마음 풍경이라니 썩 유쾌하지 않지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타인을 향한 모멸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오직 자본만이 ‘좋은 삶’의 척도가 되다 보니 없는 자를 업신여기는 행위는 하나의 풍토처럼 되어 버렸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이유로 콜센터 직원이나 승무원 등 서비스업 종사자를 비하하고 무시하는 모습 역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 ‘땅콩 회항’ 논란을 빚었던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승무원과 사무장에 대한 상식을 넘어선 태도가 전 국민의 분노를 산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손님과 판매원의 관계를 ‘갑과 을’이라는 수직적인 권력관계에 빗댄 한 코미디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는 현상도 우리 사회에 일상처럼 스며든 ‘타인에의 모멸’을 잘 보여준다.

 

 

전통적인 신분 관념이 온존하는 사회

 

저자는 이처럼 모멸감이 만연하게 된 현상의 원인을 역사적 배경에서 찾는다. 한국은 전통적인 신분제도가 대부분 무너진 사회로 평가되지만 그것이 무너진 맥락을 보면 흥미롭다. 조선 후기 약화된 양반의 위상, 잇따른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짧은 기간 동안 엄청난 살상이 자행되면서 기존 질서가 통째로 뿌리 뽑혔으며 산업화와 함께 전근대적 신분 질서는 빠르게 해체됐다.

 

 

이렇듯 한 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격변은 전통적인 신분제도를 빠르게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자각적인 청산이 아니었다. 봉건적 신분제에서 억눌려 있던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이루어낸 성과도 아니었고, 구체제에 대해 위기의식을 가진 지배세력이 스스로 개혁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권력의 시스템이나 사회 구조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거나 논쟁하지 못했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비전을 창조하면서 현실과 맞붙어 싸운 경험이 박약했다.(p.125)

 

 

겉으로 보이는 신분제는 사라졌으나 신분의식은 온존하게 된 것은 이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저자는 혼란기를 통과하면서 기존의 지배 질서는 무너졌지만 귀족적 차별의식은 오히려 보편화되었으며 ‘학력, 빈부, 외모, 지위’ 등이 신분 관념의 강력한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고 설명한다. 그런 차이를 중심으로 귀함과 천함을 구분하고 자기와 타인을 위아래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모멸, 파괴를 향한 분노의 방아쇠

 

모욕이 너무나도 쉬운 사회. 저자는 일상의 모멸들이 곧 수치심을 낳고 훼손된 자아를 회복하려는 충동이 폭력으로 표출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2011년 노르웨이에서 69명을 사살한 브레이비크의 테러 사건을 비롯해 세상을 위협하는 이유 없는 저주와 맹목적 폭행의 씨앗은 ’모멸감‘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많다. 모멸은 또한 ’자기모멸‘을 확대 재생산해 자살이라는 자기 파괴로 이어지기도 한다.

 

저자는 모욕을 주고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개인의 인권과 정의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정비를 주문한다. 그것은 단순한 법적 제재가 아닌 쾌적한 공간 마련 등 개인의 자기 모멸을 덜어주는 환경의 변화를 의미한다. 나아가 ‘모욕 감수성’이라는 개념을 제안하며 개인은 물론 사회적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감수성을 지닐 것을 당부한다.

 

 

 

 

<모멸감>은 다소 낯선 감정의 마음 풍경으로 한국 사회를 분석하며 우리 주변, 더불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자칫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이지만 문학작품, 영화, 실제 사건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어 매우 쉽게 읽힌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모멸의 감정과 책의 중심내용을 ‘음악’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작곡가 유주환 씨가 텍스트를 바탕으로 수치심과 모멸감을 다룬 10개의 곡을 선보인다. 감정을 반영한 날카로운 현악 4중주를 들으며 책을 읽어보는 것도 색다른 묘미가 될 것 같다.

 

결국 우리 모두를 파국으로 이끄는 모멸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고 스스로 인지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다. 이미 체화된 상대에의 모멸을 일상화하면서 우리는 정작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또 다른 자아’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울분과 치욕을 삼키며 두려움을 상냥함으로 둔갑하길 권하는 병든 사회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